I. 서론: 판(版)에서 시작된 물음
김태혁(KIM Taehyuk, b. 1966)의 작업은 언뜻 설치미술의 문법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조형 언어의 근원을 추적하면, 이는 공간 예술가로서의 출발이 아니라 판화가로서의 신체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앙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동경예술대학 대학원에서 노다 테쓰야(野田哲也)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판화를 연구한 경험은, 그의 조형 어휘 전체의 물리적 토대를 이룬다. 동판화(오목판화, Intaglio)의 잉킹(inking) 과정에서 물감/잉크를 손으로 직접 만들고 닦아내며 체득한 유연성과 점성에 대한 감각, 그리고 목판화(볼록판화, Relief/Woodblock print) 작업에서 안료에 아교나 풀을 배합해 직접 제작하며 체득한 물성에 대한 이해는, 이후 그가 물감을 "무엇을 그리기 위한 매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조형적 오브제가 될 수 있는 물질"로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지점에서 김태혁의 작업은 하나의 근본적 질문으로 수렴한다 — 지지체와 물감의 관계성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그의 전 작업을 관통하는 단일한 축이며, <STANDING>(2009~), <OFF>(2014~), <EXODUS>(2020~), <LINE>(2020~), <EMPTY/THERE>(2020~), <YELLOW PIE>(2021~)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리즈는 결국 이 하나의 물음에 대한 순차적이고 누적적인 응답들이다.
II. 미술사적 맥락: 모노하의 계보와 결정적 차별성
김태혁의 작업, 특히 <OFF>와 <EXODUS> 시리즈에서 보이는 재료 자체의 물성에 대한 천착, 지지체의 해체, 프레임으로부터의 이탈은 필연적으로 일본의 모노하(もの派, Mono-ha) 운동과의 비교를 소환한다. 세키네 노부오(関根伸夫)나 스가 기시오(菅木志雄) 등이 사물(もの) 그 자체를 가공하지 않은 상태로 제시함으로써 사물과 공간,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던 태도는, 물성을 통해 재현을 넘어서고자 한 김태혁의 방법론과 표면적으로 공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결정적 차별성이 있다. 모노하가 자연물과 인공물(돌, 나무, 철판, 유리 등)을 최소한의 개입으로 병치시켜 '있는 그대로'의 존재론을 탐구했다면, 김태혁의 출발점은 철저히 회화 내부에 있다. 그는 캔버스라는 지지체 위에 물감을 얹는 서양 회화의 가장 근원적인 공식 — 미술관 캡션에서 흔히 마주치는 "oil color on canvas"라는 표기 관습 자체 — 을 문제 삼는 데서 출발했다. 즉 <OFF> 시리즈는 오브제의 배치가 아니라, 평면 회화의 방법론 내부에서 발생한 균열이다. 물감을 캔버스라는 지지체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시켜 투명한 플루오로카본 낚싯줄로 짠 네트 위에 얹는 행위는, 회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의 조건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탈평면 회화(post-planar painting)'의 계보 안에 있으되, 조각적 오브제화가 아니라 회화가 스스로의 지지체를 벗어던지는 과정으로 독해되어야 한다.
III. 그물망과 네트워크 — 폰타나와의 접점, 연기(緣起)와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
<OFF> 시리즈의 물리적 토대는 들실(warp)과 날실(weft)로 짠 격자무늬의 그물망이다. 이 그물망을 단순한 지지 구조로만 읽는다면 <OFF>의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영호(중앙대 교수)는 조선일보미술관 개인전 평문에서 이 그물망을 문자 그대로 네트워크(network)로 명명하며, 김태혁의 조형실험이 "과정(過程)과 연기(緣起) 그리고 관계(關係)의 사유가 지배하는 후기 디지털 정보시대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독법은 <OFF>의 존재론적 구조를 정확히 겨냥한다.
연기(緣起)로서의 그물망: 그물망은 개별 실 한 가닥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들실과 날실이 교차하는 매듭 하나하나가 서로를 붙들어야만 비로소 "망"이라는 구조가 발생한다. 이는 불교의 연기론 — 모든 존재가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만 현상한다는 사유 — 을 물질적으로 육화한 구조다. 그물망의 매듭은 곧 관계 그 자체이며, 그 위에 얹힌 물감의 점·선·면은 이 관계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네트워크로서의 그물망: 동시에 이 격자 구조는 노드(node)와 엣지(edge)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디지털 네트워크 위상(topology)과 형태적으로 공명한다. 중심이 없고 모든 교차점이 잠재적으로 동등한 이 구조는, 위계적 재현 체계가 아니라 관계의 분산 속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네트워크적 세계관을 선취한다. 즉 <OFF>의 그물망은 불교적 연기와 디지털 네트워크라는,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사유 체계가 동일한 형식(격자·관계·매듭) 안에서 겹쳐지는 지점을 보여준다.
루치오 폰타나와의 접점과 결정적 차이: 공간 탐구라는 측면에서 <OFF>는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e)' 연작을 떠올리게 한다. 폰타나가 캔버스에 구멍을 뚫거나 칼집을 냄으로써 2차원 평면 너머의 실재 공간을 드러냈듯이, 김태혁 역시 평면 회화의 조건을 넘어 3차원 공간을 회화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정반대다. 폰타나의 공간은 절개와 부재를 통한 발견(캔버스를 찢어 그 뒤의 공간을 드러냄)인 반면, 김태혁의 공간은 관계의 축적을 통한 구축(투명한 그물망을 짜서 그 앞에 새로운 공간을 세움)이다. 하나는 단일한 파괴적 제스처이고, 다른 하나는 수천 개의 매듭이 누적된 구축적 행위다. 한국 미술사에서 폰타나의 계보를 잇는 권영우의 한지 뚫기 작업과 비교해도, 김태혁의 방법은 '뚫음'이 아니라 '엮음'이라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이 그물망 위에서 2016년경부터 전개된 기법 — 격자의 각 칸을 얇은 반투명 물감으로 채워 나가는 방식 — 은 그물망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도 붓질(brush stroke)이라는 회화의 본질적 행위를 다시 불러들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OFF> 연작이 단순히 지지체를 부정하는 개념 미술이 아니라, 회화적 행위 자체를 네트워크 구조 안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준다.
IV. 전환의 지점: <STANDING>에서 <OFF>로
캔버스 표면에서 물감을 수직으로 세우는 <STANDING> 시리즈(2009~2013)는 그 자체로 이미 지지체-물감 관계의 재정의를 향한 첫 시도였다. 그러나 작가 자신의 술회에 따르면 이 방식은 "보관상의 어려움"이라는 물리적 한계에 부딪혔고, 이 실패 혹은 제약이 오히려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추동했다. "물감을 세워보았으니, 다음은 지지체로부터 물감을 띄워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발상적 전환은, 조형적 문제의식이 기술적 제약과 만나 새로운 형식을 낳는 창작 과정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는 김태혁의 작업이 관념적 선언이 아니라 재료와의 물리적 씨름 속에서 단계적으로 발견되어 온 것임을 증언한다.
V. 대표작 분석
1. OFF-P 200415111853 (2020,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159×119.2cm)

KTH2020-11
OFF-P 200415111853
- Year
- 2020
- Medium
-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 Dimensions
- 162x119cm
<OFF> 시리즈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들실과 날실로 엮은 투명한 플루오로카본 네트 위에 메디움과 혼합한 아크릴 물감을 얇게 터치하여 완성된다. 형식적으로 이 작품이 성취하는 것은 이중의 역설이다 — 물감은 여전히 안료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을 떠받치는 지지체는 불가시성(invisibility)을 속성으로 하는 재료다. 그 결과 물감의 얇은 알갱이들은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혹은 공중에 정지된 입자처럼 보이며, 관람자는 안료가 중력을 거스르고 부유하는 듯한 시각적 착시를 경험한다. 여기서 투명성(transparency)과 부유감(suspension)은 단순한 시각 효과가 아니라, 작가가 말하는 '순환 사이클' — 먼지가 부유하다가 침강하고 다시 해체되어 부유하는 자연의 반복 원리 — 을 조형적으로 육화한 장치로 기능한다.
제목에 내포된 시간 코드(YYMMDDHHMMSS)는 이 작품을 특정한 순간에 고정시키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이 순간에도 자연의 점진적 변화는 쉼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비고정성의 철학을 선포한다. 분류코드 'P(PLANE)'는 <OFF-D(점)>에서 <OFF-L(선)>을 거쳐 도달한 '면'의 단계로서, 점진적 변화라는 주제가 형상의 위계(점→선→면→입체) 안에서도 구조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EXODUS 210212175237 (2021,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Variable Size)

KTH2021-03
EXODUS 210212175237
- Year
- 2021
- Medium
-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 Dimensions
- Variable Size
<EXODUS>는 <OFF>의 제작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형식적 계기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낚싯줄 네트를 짜는 과정에서 들실과 날실의 장력이 만들어내는 등고선적 형태(topographic form)를 목격한 작가는, 이를 액자라는 최종 봉합 장치 없이 벽이나 공간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이는 조형적 '발견'이 사전에 기획된 개념을 앞서는, 매체 실험 고유의 우연성이 작품화로 이어진 사례다.
액자로부터의 이탈은 <OFF>가 지지체(캔버스, 액자)와 물감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EXODUS>는 그 관계 자체를 '해소'하고 물감/네트를 순수한 공간적 사건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질적 도약을 이룬다. 낚싯줄 위에 놓인 소량의 미디움 혼합 안료 알갱이는 푸른 입자의 망토, 먼지, 혹은 안개꽃 군집을 연상시키며, 이는 회화적 밀도의 재현이 아니라 입자적 존재의 직접 제시라는 점에서 회화와 조각/설치 사이의 경계를 실질적으로 무효화한다.
3. YELLOW PIE 210615100329 (2021,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260×260cm)

KTH2021-44
EXODUS SERIES & YELLOW PIE 210615100329
- Year
- 2021
- Medium
- Mixed media on Fluorocarbon line
- Dimensions
- Variable Size, 260×260cm
<EXODUS>의 변형인 <YELLOW PIE>는 캔버스 위나 액자 안에 있어야 할 물감/내용물을 전시장 바닥에 직접 놓아둠으로써, 안료가 지니는 매스(mass)와 질감을 매개 없이 노출시킨다. 이는 지지체와의 관계를 '이격'하는 것을 넘어, 물감이 어떠한 지지체도 요구하지 않은 채 그 자체의 물리적 존재로 성립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극단의 실험이다. 원형의 노란 매스가 전시장 바닥에 놓인 형상은 회화적 안료가 조각적 질량으로 전이되는 순간을 포착하며, "물감이 우리 주변에 새로운 모습으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작가의 핵심 화두를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구현한다.
4. THERE-220627120509 (2022, Acrylic color on Wood, 168×125cm)

KTH2022-01h
THERE-220627120509
- Year
- 2022
- Medium
- Acrylic on Wood
- Dimensions
- 165x122
<EMPTY/THERE> 시리즈는 <OFF>의 내용물(네트)이 액자 안에 있지 않고 <EXODUS>처럼 바깥 공간으로 이탈한 뒤, "남겨진 액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이 지점에서 김태혁의 작업은 존재론적 전회를 이룬다. 텅 빈 액자 그 자체가 작품이 되는 이 시리즈는, 부재(不在)가 오히려 관람자로 하여금 "비어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역설을 활용한다. 없음(無)은 있음(有)의 대립항이면서 동시에 있음을 환기시키는 이중적 개념이며, 실제 전시 공간에서는 빈 액자라는 실체(實)와 그곳에 드리워지는 관람자 자신의 그림자, 즉 허상(虛)이 공존한다. <STANDING>에서 시작해 <OFF>를 거쳐 <EXODUS>로 물감이 지지체를 이탈해 온 서사가, <EMPTY/THERE>에 이르러 지지체(액자) 자신의 존재론적 질문으로 반전되는 이 구조는 시리즈 전체를 하나의 순환적 서사로 완결짓는다.
VI. 형식 분석의 종합: 다섯 가지 조형 언어
김태혁의 대표작들을 관통하는 형식적 특질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 투명성(Transparency): 플루오로카본 라인이라는 무색 소재의 선택은 지지체를 '지우면서 남기는' 역설적 전략이다. 지지체는 시각적으로 소거되지만 구조적으로는 여전히 작동한다.
- 부유감(Suspension): 안료가 중력이나 화면의 평면성으로부터 이격된 상태로 제시되며, 이는 순환 사이클이라는 주제의식을 신체적 감각의 층위에서 전달한다.
- 빛과 그림자(Light and Shadow): 투명한 지지체 위에 놓인 안료는 필연적으로 안팎으로 빛과 그림자를 동반하며, 2차원적 평면성과 3차원적 공간성이 동시에 작동하는 이중의 시각장을 형성한다.
- 등고선적 형태(Topographic Form): 들실과 날실의 장력 균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지형학적 형상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채 자연의 생성 원리를 물질 스스로 반복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네트워크성(Networked Relationality): 격자로 짜인 그물망의 매듭 구조는 연기론적 상호 의존과 디지털 네트워크의 위상을 동시에 함축하며, 개별 안료의 점·선·면이 관계망 없이는 성립할 수 없음을 형식 자체로 증명한다.
VII. 결론: 회화의 자기 갱신으로서의 공간 확장
김태혁의 작업을 단순히 '탈장르적 설치미술'로 범주화하는 것은 그 근본적 출발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의 전 작업은 판화 실습실에서의 물성 체험이라는 지극히 회화적·기술적인 토대 위에서, 회화의 가장 근원적인 공식 — 지지체 위의 안료 — 을 단계적으로 해체해 나가는 일관된 궤적을 그린다. <STANDING>의 수직화, <OFF>의 이격, <EXODUS>의 프레임 이탈, <EMPTY/THERE>의 부재의 존재론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은 회화가 스스로의 조건을 심문하며 공간으로 확장해 나가는 자기 갱신의 서사다.
작가가 예고한 향후의 <ON>(재결합)과 <IN>(침투) 시리즈는, 이 순환이 일방향적 탈주가 아니라 불교적 인연설에 기반한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의 작용 아래 다시 지지체로 회귀할 가능성을 내포한 열린 구조임을 예고한다. 이는 김태혁의 작업 전체가 하나의 완결된 양식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물음의 순환 사이클 그 자체임을 방증한다.
이 순환의 물리적 매개가 다름 아닌 그물망, 즉 네트워크라는 사실은 그의 작업에 이중의 시의성을 부여한다. 연기론적 사유의 오랜 전통과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의 새로운 위상학이 하나의 격자 구조 안에서 만나는 지점에서, 김태혁의 회화는 과거의 철학과 동시대의 기술적 세계관을 함께 품은 매체로 확장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