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연 Booyeon Kim

ARTIST

김부연Booyeon Kim

생몰연도
1969 — 2013
국적
대한민국
분야
회화
01

작가의 철학

‘그리기’란, 행위에 ‘살아있게 하기’의 의미를 부여한다. 손을 통해 진흙으로 형상을 빚고 숨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했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처럼 질료를 통해 형상을 만들고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만든 형상이 나에게 혹은 작품을 보는 이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원한다. 하지만 내가 소유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형상을 만든 ‘신의 손’이 아니다(신의 손도 불완전한 인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것과는 정반대의 손, 서툴고 미숙하나 즐김을 아는 ‘아이의 손’이다. 그것은 사실적이진 않지만 형태의 지름길을, 이성적이진 않지만 시간과 공간의 지름길을 만들어 낸다. 또한 그 손은 사물에 생기를 부여함으로써 살아있게 만든다. 그리하여 재현과 표현, 구축과 파괴, 형상과 질료,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서 자유로이 유희하는 놀이의 손을 가지고 싶다.

02

예술과의 첫 만남

“의자에 앉은 사람을 그려 주세요.” 아버지께 말했다. 의자에 앉은 사람을 그리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국민학교 입학도 전이었던 것 같다. ‘애기 부처’라는 별명을 가진 나는 말 수가 적고 행동이 소심했다. 방 안에서 그림그리기는 소질에 맞았다. 집 안에서 굴러 다니는 종이 소재의 모든 것에 그림을 그렸다. 소재를 가리지 않는 버릇은 이후로도 계속 되어 알루미늄 철판, 와인박스, 카페 냅킨 등 버려지거나 무용해진 것들을 주재료로 활용하였고, 홍천 요양시절에는 주변의 쓰러진 많은 나무들이 좋은 소재가 되어 주었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이후 나의 첫 전시이자 퍼포먼스는 어학원 기숙사 마당에 콩떼로 코끼리만한 손(hand)를 그린 것이었다. 넓은 마당도 캔버스가 되어 주었다.

중학교까지는 교내 미술부 선생님의 과도한 칭찬과 응원으로 충분했지만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대입을 앞두니 ‘미술학원을 다녀야 하나..’라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시절 다들 그랬듯이 우리 집 또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4남매 중 막내인 나는 어머니께 학원비 걱정을 끼치는 대신 미술학원을 찾아가는 배짱을 부렸다. 고등학교 1학년 성적표와 그림을 들고 원장을 대면했다. “저를 장학생으로 거둬 주십시오.” 부산 동래구의 한얼학원 원장 선생님과 그렇게 감사한 인연이 되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미술학원으로 가서 밤 12시 넘어 버스가 끊긴 시간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집까지 새벽공기를 맡으며 걸었다.

03

나만의 조형 언어

이 용어들-즐기기(jouir), 행위하기(agir), 구축하기(construire), 파괴하기(détruire), 활기를 부여하기(animer), 조작하기(manipuler), 집중하기(concentrer), 조화하기(harmoniser)…-는 모든 회화적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용어들입니다. 우리 동의할 수 있을까요? 왜일까요? 그의 회화는 어떤 의미에서 특별히 '놀이(jeu)'이며, 그것이 '어린이적(childin)'이라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용어들…은 거의 모든 형태의 회화적 실천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용어들 혹은 이러한 성격들은 창조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제 회화에서는 회화적 놀이(jeu pictural)를 가장 자주 '어린이적 차원'과 연결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 말하자면, 회화적 놀이의 정점(sommet)은 아동화(peinture enfantine)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제 회화는 이러한 성격들이 전적으로 어린이적 차원과 결합된다는 점에서 놀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이적 놀이를 하나의 진정한 놀이로 간주하며 이를 찾습니다.) 왜일까요? 1. 저에게 회화는 이성의 작업이 아니라 감각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의 회화적 활동은 자발성(spontanéité), 제스처성(gestualité), 상상된 형상화(figuration imaginée), 외관의 명랑함(gaieté de l'apparence), 자유 등과 같은 측면에서 회화적 놀이의 정점에 위치합니다. 2. 아동의 시각적 특성 또한 매우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아동적 시각이 진정한 회화적 놀이로 이끕니다. 저는 특히 아이가 추구하는 *'신호적 형식(forme signalétique)'*과 동시에 *'일반적 형식(forme générale)'*에 주목합니다. 신호적 형식은 호기심, 정서성(affectivité), 인상(impression) 등과 연결되며, 일반적 형식은 아이의 비구분적이며 무차별적인 정신 상태, 즉 개인적 성격에서 자유로운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개별성의 재현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호기심ᄋ인상ᄋ열의를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흥미로운 시각이 현실주의와 환상 사이의 그 간극에서 매우 큰 에너지를 가지고 '놀이'할 수 있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회화 작업을 위해 이 아동적 시각을 회복하고자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신호적 형식(forme signalétique)으로 그리면서도 동시에 일종의 전체적 시각(globalité de la vision)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는 신호적이고 또 전체적인 시각의 미묘함을 통해, 아이는 개별적 특징에서 출발하여 일정한 형식의 보편성(généralité de la forme)을 확보해냅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시각 덕분에 아이가 사실주의와 환상, 그리기와 놀이 사이의 그 간극(intervalle)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일정한 사실성(réalisme)을 지닐 때 더 잘 놉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성이 회화적 놀이의 고갈되지 않는 대상들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종합적(synthétique)이고 전체적이며, 비구분적(indifférencié)이면서도 신호적인 아동의 시각, 다시 말해 덜 합리적이기에 오히려 더 예민한(sensible) 이러한 시각이 회화적 놀이의 본질적 동력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어린이적 차원을 계속 추구하고자 합니다.) 어느 정도 나이에 이른 아이를 상상해 봅시다.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이성이며 과학적 시각(vision scientifique)입니다. 반면 그가 잃게 되는 것은 바로 그의 혼돈(chaos)입니다.동양적 사유(pensée orientale)? 어쩌면… 저는 종종 은유적이며 때로는 시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거나 논평하곤 했습니다. 또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자(漢字)의 분석에서 출발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자가 사유의 궤적, 즉 인간 사유의 일종의 역사 자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원하는 놀이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연(cerf-volant) 놀이' 분석, 회화에 대한 설명 등…) (이 방식을 '동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이러한 은유적 방식을 자주 사용한 이유는, 어떤 사물을 직접적으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받으면, 저는 거의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자 '회화(繪畵)'의 분석과 같은 간접적 설명 방식-어떤 유도적(inductif) 접근-혹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놀이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실제의 '연놀이'를 분석하는 방식 등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노자(Lao-tzeu)는 도(道)를 드러내기 위해 물, 골짜기, 풀무( soufflet ) 등의 은유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는 인간의 언어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은유는 상상하게 하고, 드러내고, 환기시키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image)'의 역할입니다.) 즉, 어떤 핵심(noyau)을 건드리고자 할 때, 그 핵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그 핵을 둘러싼 주변(periphery)을 더듬거나 되돌아가 그 주변을 통해 핵심을 암시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대중(공중)과의 관계 속에서 본 나의 회화의 위치 …저에게 회화란 사회(공중)를 향한 절규도 아니고, 사회 앞에서의 맹세도 아니며, 어떤 증언도, 약속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면을 향한 지속적인 대화에 가깝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의 내적 여행, 사유와 제스처의 여정이며, 따라서 개인적 놀이(jeu personnel)입니다. 그러나 제 회화에 대해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제 작업이 어느 삶에든 긍정적 성장을 돕는 빗물 한 모금 정도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적 차원(L'enfantin) …저는 종종 어린이의 정신을 혼돈(Chaos), 공허(Vide), 원초적(Originel) 상태와 결부시켜 왔습니다. 따라서 회화의 세계 안에서 이러한 성격들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저는 어린이-어른, 혼돈-질서라는 이 대립 앞에서 약간 마음이 뒤흔들리곤 합니다. 회화는 결국 이 원초적 혼돈 속에 어떤 질서를 구성해 나가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제가 Tchjuantch와 함께 제 논문에서 이미 설명했듯, 혼돈은 존재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혼돈을 죽이지 않으면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시타오(Shitao)가 자신의 '일획(Unique Trait de Pinceau)'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처럼, 저는 어린이의 제스처, 즉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지닌 어린이의 획(trait d'enfant)을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다른 회화적 놀이(jeu pictural)? 놀이는 여러 층위가 존재합니다. 사유의 놀이, 말놀이, 신체적 놀이 등등. 이와 마찬가지로 회화적 놀이에도 여러 양식이 존재할 것입니다. 차가운 놀이, 뜨거운 놀이, 자발적 놀이, 규칙화된 놀이 등. 따라서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액션 페인팅 등도 일정한 놀이적 측면을 포함하지만, 그것들이 전적으로 회화적 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 저는 회화만 하는가? -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여러 조형 활동 중에서도 저는 회화를 좋아합니다. - 제가 주로 이 회화라는 영역에서만 작업해 온 이유는, 이 회화의 영역이 매우 광대하고 깊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방대한 회화의 장 속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영역에는 여전히 탐구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놀이적 패러다임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폄하할 위험은 없는가? 그리고 당신의 기준이 미술사 중 특정 측면만을 참조하는 것은 아닌가? 사유의 놀이, 신체적 놀이, 말놀이 등 여러 종류의 놀이가 존재하듯, 회화 안에서도 회화적 놀이에는 여러 층위가 존재합니다. 제가 제 회화 작업과 제가 감응해 온 일부 작가들을 바탕으로 회화적 놀이의 어떤 분류를 시도했다고 해서, 그러한 놀이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작품들, 그 질적 깊이, 열정, 그리고 과학적 관찰을 존중하고 감탄합니다. 또한 그들이 원근의 놀이, 깊이의 놀이를 재현하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제가 클레(Klee), 뒤뷔페(Dubuffet), 아펠(Appel), 트웜블리(Twombly) 등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화가들의 회화를 자주 선호한다고 말해 온 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그 시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기를 색채적ᄋ선적ᄋ제스처적 활용 측면에서 회화적 개화기, 또는 회화적 비약의 시기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회화적 공간의 개념에 있어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회화의 표면(surface)은 재현의 장소, 현실 공간을 전사ᄋ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 표현의 장소, 즉 예술가의 내밀하고 주관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전환 속에서 저는 평면으로 간주된 표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과학적ᄋ분석적 시각에서 정서적ᄋ어린이적 시각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하나의 동력입니다.

나의 '어린이적' 회화는 원초적 놀이로의 귀환인가? 현재로서는, 나의 어린이적 회화가 회화적이며 원초적인 놀이(jeu pictural et originaire)를 탐구하려는 진지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나의 회화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어린이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제거해야 할 수많은 '성인의 층(layers d'adulte)'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내가 행복한 이유는, 앞으로의 작업을 내다보며, 나의 장차 회화가 이 진정한 어린이적 길 위에 놓이게 될 하나의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20세기 초, 특히 파울 클레(P. Klee)가 어린이적 차원에 관한 탐구를 시도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넓은 장(場)에는 아직 탐색되지 않은 공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저는 나의 어린이적 회화와 함께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 하나의 확신과 긍정적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0세기 초부터 어린이적 차원에 대한 연구가 있어 왔다 하더라도, 아직도 많은 공간ᄋ영역이 탐구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회화는 아직 진정으로 어린이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오늘 제가 기쁘게 느끼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나의 회화가 이 어린이적 길 위에서 가능성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이 어린이적 길이 회화적이면서 원초적인 놀이로 이어진다고 기대하고 그렇게 판단합니다. 분명 저는 아동화에서 여러 문제들을 봅니다. 아동의 그림은 종종 도식화되고(schématisé), 서로 비슷비슷해집니다. 장 뒤뷔페(J. Dubuffet) 역시 아동화의 한계-어떤 폐쇄된 정신 상태-를 지적한 바 있으며, 그는 자신이 가진 '더 긴 다리(longue jambe)'로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저 역시 아동화에서 이러한 문제를 느끼고 있으며, 오히려 제 삶의 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직사각형의 서브스트레이트(subjectile rectangulaire): 저는 직사각형 서브스트레이트에 대해 일정한 규범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떤 규범을 세웠다고 해서, 그 규범 안에 자신을 가두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일단 규범이 설정되고 나면, 그 규범은 제가 겨냥하는 목표이자 동시에 깨뜨리는 대상이 됩니다. 혹은, 보다 긍정적으로 말해, 그 규범은 제가 가지고 노는 하나의 놀이 대상(objet de jeu)이 됩니다. 저는 그것을 수정할 수도 있고, 배반(trahir)할 수도 있습니다. '놀이(jouer)'라는 성격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놀이가 규칙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놀이는 또한 규칙을 새로 만든다(créer la règle)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이는 창조적 정신과 함께 움직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파괴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직사각형은 파괴되어야 할 어떤 것입니다. 그것(나의 회화)은 근대성의 계승자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클레(Klee), 뒤뷔페(Dubuffet), 트웜블리(Twombly) 같은, 제가 논문에서 자주 언급한 화가들을 좋아합니다. 이는 곧 제 회화의 동력이 그들이며, 20세기 전반이라는 시기가 제게 훨씬 매혹적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저는 조금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가들이 제 회화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제가 언젠가 넘어서야 하는 일종의 장벽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가 이 시기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 시기를 색채적ᄋ선적ᄋ제스처적 활용과 관련하여 회화의 개화기(épanouissement) 혹은 비약의 시기(élan)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회화적 공간에 대한 사유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회화의 표면은 더 이상 재현의 장소, 현실 공간을 필사하거나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 표현의 장소, 즉 예술가의 내밀하고 주관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저는 평면으로 간주된 표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과학적ᄋ분석적 시각에서 정서적ᄋ어린이적 시각으로 이동시키는 하나의 동력(moteur)이기 때문입니다.

회화성(picturalité)·조형성(plasticité)과 놀이적 차원

회화성(그리고 조형성)의 개념이 놀이적 차원과 결부될 때, 그 사용은 신중하고 엄밀해야 합니다. 즉, 주의 깊게 정의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는 제 논문의 핵심 쟁점이기도 합니다. 회화적 차원과 놀이적 차원의 조율은 여러 질문을 제기합니다. (저의 회화가 다른 다수의 '놀이적 실천'들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문제 등…)

처음부터 제 의도는 회화성을 통해 공간성과 시간성의 일종의 통합을 탐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공간성과 시간성, 조형성과 제스처성, 형식의 성질과 시간의 성질을 회화성의 도움으로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회화성은 형식과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회화가 놀이와 결합될 때 시간의 흔적은 훨씬 중요해집니다. 왜냐하면 놀이란 그 결과보다 진행 과정 속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회화적 과정이 공간성과 시간성, 조형성과 제스처성-달리 말해 공간의 성질과 시간의 성질-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자주 강조해 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그라피티풍 풍경' 설명)

'회화적(pictural)', '회화성(picturalité)', 그리고 '조형성(plasticité)'의 개념은 제 논문의 주요한 쟁점입니다.

제가 회화적 영역을 놀이적 차원과 조율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둘을 어린이적 성격을 통해 매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회화성과 놀이성은 매우 다른 두 영역으로, 동일한 축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회화성은 주로 물질성(materialité)을 지시하는 반면, 놀이성은 주로 정신의 상태(état d'esprit)를 향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둘을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적 성격이 두 영역을 이어주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예술을 숨기는 예술이다.

열정과 생명력으로 의식을 넘어서는 것.

서사성(Narration)에 대하여 : 회화는 우선 '언어'이지만, 특수한 언어이다. 내 회화에서 내가 서사적 차원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려 하는 것은 바로 회화적 차원, 형상적 차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서사의 개입은 형상 혹은 이미지가 지닌 힘을 약화시킨다.

이미지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지와 언어가 서사적 동맹을 맺는 순간, 이미지는 곧바로 그 고유한 힘을 잃어버린다. 이미지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어버리고, 더 이상 자율적 존재가 아니다.

내게 있어 이미지는 '드러냄(révélation)'의 의미, '자기-현존(auto-présence)'의 의미를 유지해야 한다. '서술(raconter)'하거나, '지시(désigner)'하거나, '설명(expliquer)'하는 기능을 맡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한 그림 안에 뚜렷한 일화적 내용이나 서사가 없다면, 그 그림은 자신이 말을 건네야 할 상대를 찾아 나선다. 즉, 그림은 관람자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그림(이미지)과 관람자 사이에 생겨나는 중간적 공간, 그 이미지와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그 공간이다.

이 효과는 그림이 수동적으로 '읽히는 것'을 멈추고, 그림이 자기 고유의 언어, 즉 회화적 언어(langage pictural)로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나에게 회화는 이미지의 예술이지, 언어의 예술이 아니다.

그럼에도 회화 속에서 서사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서사는 언제나 돌아온다. 그리고 어떤 것이 반복적으로 돌아올 때-이를테면 새(bird)가 자주 등장할 때-그것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사는 모호한 서사이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위한(raconter)' 서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위한(parler à)' 서사이다.

필연-우연 혹은 필연-자유의 관계 : 놀이 속에서는 필연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던 대립이 서로를 소멸시킨다.

04

작업 과정과 방법

1. 사회(대중)와의 관계 속에서의 놀이그림의 위치 (rapport entre le publique et ma peinture) ....사회를 향한 절규도 아니고, 사회에 대한 선언도 아니며 증명이나 약속 또한 아니다. 오히려 내면을 향한 끊임없는 대화 즉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사고와 행위의 여정이며 개인의 놀이이다. 하지만 사회를 향한 바람이 있다면 나의 작업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2. 아동적인 것과 질서, 즉 아이 개념과 일련의 질서의 산물인 그림사이에 존재하는 대립을 어떻게...? .... 아동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영원히 그 경지에 도달치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마치 우리의 육체가 아이의 그것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이상일수도 있다. 아동의 세계는 혼돈, 무분별, 여백, 근원 등의 의미로 연결되는데 다시 말해서 아이의 세계는 하나(일, 법)의 가능태로서의 의미가 있다. 아동의 개념은 이 법이 태어나기 이전상태로서 만법의 가능태 이다. 동심을 추구한다는 것은 완전한 혼돈이 아니라 가능테로서의 혼돈을 지향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그림 속에 법의 가능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림의 세계에서 법이나 질서 따위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중에 생성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놀이'의 의미 : 실제로 한국어에서 '놀이'라는 말은 많은 경우 부정적ᄋ유치한ᄋ가벼운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오직 음악 분야에서만 '연주하다(=jouer)'라는 말이 긍정적 의미를 획득한다.

회화성(picturalité), 조형성(plasticité) : (제 목차적 배치 상 원문의 해당 단락은 설명 없이 제목만 존재했으므로 그대로 유지)

새(Oiseau) : 사실 우리 전통에서는 하늘에 대한 경외와 결부된 '새 숭배' 문화가 존재한다. 따라서 새는 희망, 다른 세계를 향한 동경을 상징한다.

그런데 내 회화에서 새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1. 첫째, 새는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나에게 새는 명랑함, 꿈과 연결된다.

머리 위의 새 : 형식적으로는 조형적 효과(plasticité)를 위한 것이다. 만약 여기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05

재료와 감정

“행위에 기반하며 생명력 있는 아동의 특성들로부터 특정한 '회화적 이미지'를 발견하고자 한다.” “화폭의 하단 절반은 땅의 세계를 표현한다.” 이 영역에는 땅의 마티에르를 떠올리며 물질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트레(선)는 시간 개념(행위)을 내포한다.” 역동적 힘과 직결되어 있다. “시간, 힘, 역동성이 공간, 형태, 안정성에 저항한다고 볼 수 있다.” “아동적 선과 그래피티의 사용, 회화 속 우발성의 개입은 형태의 구상에 대항한다.” “선과 색 효과의 증가는 부피와 깊이 효과의 감소로 이어진다. … 깊이와 부피를 희생양으로 삼아 선과 색의 자율성에 가치를 부여해 평면을 찬양하는 작업이다.” “정사각형의 틀과 두 개의 물고기 이미지가 상당한 대칭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바, 작품 역시 자연스레 대칭적 구조를 향한 것이 아닐까.”

(논문) 해당 주제와 관련해 나의 회화 작업 가운데 ‘인물(Personnages)’ 시리즈 (ill. 3, 12-1, 12-2, 12-3, 12-4, 13)와 통칭 ‘그래피티 풍경(paysages graffités)’ 시리즈 (ill. 28, 28-1,..., 28-9)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인물’ 시리즈는 직사각형 화면과 연결된 형태에 대한 관심에서 동기를 얻어 제작되었다. 즉 인물 형상은 정적이고 균형이 잡혀있다. 은연중에 언급한 바 있듯, 이 정적 형상들에게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기법은 다음과 같다: - 상상에 의해 화면을 경계를 넘어서는 형상 (사고체계에 의한 연장 효과). - 중심의 이동 - 오브제 혹은 동물의 배치(예를 들어 새) - 긁어내기 기법(시간의 효과)과 마티에르의 추가 - 안면의 표정, 등. 회화에서 형태는 주어진 공간 속에서 결정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다. 형태는 고정적이다. 형상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위해 인물 시리즈에서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왜곡이다. 몸의 형태는 마름모꼴로 왜곡된다. 어깨 선은 화면의 경계까지 연장되거나 심지어 넘어선다. 왜곡은 형태를 선의 내제적 가능성에 맡겨 형태를 연장하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다. 형상 속 긁어내기 기법으로 그려진 긴 선들(ill. 13 참조)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선의 연장은 힘의 연장이다.

형태는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작업의 결과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형태를 구상하고 미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어, 베르그송이 밝혔듯 관객은 형태를 통해 해당 인상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은 형태가 소유하는 성질이며, 모든 형태의 근원은 그것을 그려내는 움직임에 있다. 형태는 온전히 저장된 움직임이다”. 내부적 움직임이건 외부적 움직임이건, 형태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움직임이다. 나의 목적은 공간과 시간 사이의 상보성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시간 경험(힘, 역동성, 움직임)은 공간 경험(형태)을 보완하며 공간 경험은 시간 경험을 드러낼 것이다. 허나 작업에서 이 두 경험들 사이의 상보성을 구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자를 강조하는 만큼 후자는 희미해지며, 후자를 강조하는 만큼 전자 역시 빛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피티 풍경(paysage graffité)’에서는 두 개념을 양립시키고 종합하고자 했다. 본 주제는 ‘인물(personnages)’ 시리즈를 거친 후 떠올랐다. 인물 시리즈를 통해 형태에 생명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를 진행했으나, 해당 주제는 본래 형태에 치우쳐 있었다. 본 작품들 속 모든 회화적 요소들이 형태의 구축에 기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낮의 에너지와 밤의 에너지가 함께 흐르며 하나의 에너지가 다른 하나의 에너지를 지배하기 시작하는 시간인 일출과 일몰을 좋아한다. 상반된 에너지들의 지속적인 교환이 발휘하는 놀이를 좋아한다. 이것 없이는 생명도, 영원한 회귀도 있을 수 없다. 일출 시간, 형태의 평온을 가리는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꽃잎이 하나 둘씩 열리기 시작해 환상적인 형상을 드러낸다. 일몰 시간, 태양 빛 아래 환상적 모습의 형태는 암흑의 에너지 앞에서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감성적이고 내면적인 본능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두 에너지가 대립하는 시간들은 나의 호기심을 유혹한다. 금빛의 일몰은 감각의 점차적인 우세를 알리며 안개의 점차적 소멸은 형태의 우위를 알린다. 두 에너지의 역동적 교체를 통해, 해당 시공간은 불가사의한 풍경을 구축한다.

한편, 한 에너지의 극단으로 기울기 않기 위해 균형을 잡는 일 역시 중요하다. 두 팔을 벌리거나 긴 막대를 수평으로 잡아 규칙적인 흔들림을 수행해야 반대편에 도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래피티 풍경(??)’에서 두 힘 간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작품의 제목도 의미를 강화한다.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은 ‘그래피티’ (시간, 제스처) + ‘풍경’ (공간, 형태)으로, 둘 간의 조화가 작품의 의도다. 이에 관해서는 “그래피티적 풍경(Le paysage graffité)” 파트에서 보자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06

작업의 전환점

아주 작은 포맷의 종이 위에 그려진장난꾸러기(ill. 1)는 제스처적 측면을 부여함과 동시에 아이의 형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본 작품의 모티프는 모든 건반이 다른 색으로칠해져 개별적 색채에 개별적음이 부여된 장난감 실로폰이었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강렬한 색감이었다. 본 작품은 매우 친숙한 장면을 그렸다. 화면의 중앙에 배치된 아이는장난감을 들고 있다(당시 이와 같은 광경을 매일 볼 수 있었다). 아울러 그는 다소 은유적 형태로 표현된 장난감들로 둘러쌓여 있다. 당시 나의 작업에는 장난감이 자주 등장한다. 장난감은 색채의 강렬함, 형태의다양성과 더불어 상징적 의미가풍부한 오브제이기 때문이다. 놀이의 도구인 장난감은 무해함과 친숙함을 연상시키는 물건이다. 장난감은 풍부한 상징성을 지닌 물건으로 다양한 색깔과 형태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어린 아이는 장난감과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고 장난감은 아이의 생각에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아이는 장난감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장난감들은 그에게 화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작품은 아이와 장난감 간소통의 장면이기도 하다. 수 많은 장난감 가운데 나는 아들이 잠을 잘 때 찾곤 했던 작은 큐브 형태의 장난감에 집중했다. 아들은 이큐브를 손에 쥐고 자는 일이 많았는데, 이 큐브는 아마 아이에게 신비한 물건이자 꿈의 오브제였을 것이다. 내가 당시부터 현재까지의 작품에서 정사각형, 직사각형 그리고 육면체를 즐겨 그리는 이유다. 나는 이사각형들에 신비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우리는 장난감에 깊은 흥미를 가졌던 또다른 화가를 찾아볼 수 있다. 코브라의 회원이었던 카렐 아펠은 세상을 장난감처럼 바라본 인물이다: “세상과 삶을 바라볼 때 마치 장난스럽고, 신비롭고, 감정적이며, 기계적이고 시적인 장난감으로 본다. (…) 내가 바라보는 것은 외형 자체가 아닌 모양과 색을 가진 놀이의 형태를 한나만의 현실주의적 꿈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색색의 거대한 장난으로 채우는 상상은 실로 환상적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세계가 장난감과 어느 정도 닮아 있음을, 탄생과 재생 사이의 유희적 요소들로 구성됨을 보여주고 싶다. 세상은 사실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놀이다”.

이 그림(ill. 1)은 육체적, 정신적 측면 모두에서 놀이를 한다는 감정으로, 즉흥적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본 작품은 우연히 방문한친구의 작업실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내게 재료와 작은 종이 한 장을 선물했다. 나는 유화, 크레용, 포스튤라와 손가락을 사용했다. 붓을 사용하지 않으니, 그림의 선들은 곡선보다는 직선의 느낌을 갖게 되었다. 손가락과 붓이 아주 유사한 효과를 내는데도 말이다(두도구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뒤에 다루도록 하겠다). 무질서하고, 복잡하며, 유치한 인상을 준다. 심지어 그래피티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게임(game)보다는 놀이(play)에 가까운 활동이다(프랑스어는 ‘jeu’ 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역주). 본작품은 내 유년기의 기억들과 아들의 행동, 그간 보아 온 어린 아이들의 행동의 연장선이다. 본 작품은 세상과 삶과 동떨어져, 낙천적이고 순진한 제안이다. 마지막으로 본 작품은 내 회화 작업의 목적 자체, 다시 말해실제 아이가 되는 일이다.

SELECTED WORKS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작

대표작 1 이미지

01 / REPRESENTATIVE WORK

망태할아버지.

서사적 가치는 내가 작업에 도입하기를 꺼려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망태할배(Grand-pere Man-Tai) (ill. 9)는 매우 특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친구의 집을 방문했던 때, 친구의 아내는 자녀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녀가 “망태 할아버지가 올 거야!”라고 말하자 딸 아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나는 흥미를 느껴 그녀에게 망태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았고, 이 일화를 밭탕으로 망태 할배를 그리게 되었다. 이 그림은 다수의 서사적 요소들을 내포한다. 여러 개의 화살표들은 이야기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화폭 한 가운데 그려진 그물 주머니가 화살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그림 속 이야기의 존재를 상기하기도 한다. 나아가 우측 상단에 쓰여진 “par la fenêtre(창문 밖으로)”라는 문구는 형상과 관계된 하나의 서사를 암시한다. 그림 속 아이가 상상하는 총은 할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 작품에서 다수의 서사적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것을 의도한 적은 결코 없다. 해당 작업의 목적은 분명 서사적 회화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서사적 성질의 제거를 위해 다양한 전략을 도입했다. 그것들을 분석해 보자.

정면성: 우선 정면을 응시하는 아이와 망태 할아버지라는 두 개의 형상을 그렸다. 두 인물 모두 관객을 향하기 때문에 둘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지난 수 세기의 서사적 회화를 살펴보자. 화가는 묘사할 장면을 선택한 뒤 등장 인물들을 상호 소통하는 형태로, 동일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협력하는 형태로 표현한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맡은 역할을 수행하며 전체적 이야기의 원활한 흐름에 기여한다. 행위, 시선, 태도와 움직임은 인물들이 이야기와 관계 맺음에 있어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내 작품 속 두 등장인물(아이와 할아버지)들이 정면을 응시하며 특정한 움직임의 기미가 없는 상태는 두 이미지 간에 존재할 수 있는 관계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며 둘 간의 의사소통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리하여 관객을 응시하는 두 인물은 화면 속 장면의 맥락에 귀속되기를, 수동적으로 읽히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서사적 순서로부터 벗어난다. 오히려 두 인물은 화폭 위의 회화적 공간이 아닌, 자신과 관객 사이에 공간을 창조하고자 한다. 그곳은 관객이 이미지와 소통하는 공간이다. 올랭피아(Olympia), 풀밭 위의 점심식사(Le Déjeuner sur l’herbe), 튈르리에서의 음악회(La Musique aux Tuileries), 철길(Le Chemin de fer), 늙은 음악가(Le Vieux musicien) 등과 같은 마네(Manet)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느껴지는 특이한 감정이다. 이것은 독자의 흐름을 깨며 관객에게 ‘말을 거는’ 행위가 아닌가?

오브제의 배치: 그리스 신화, 혹은 여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보면 모든 인물들이 자신에게 고유한 물건을 갖고 있거나, 해당 인물의 특성을 자동적으로 비추는 오브제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오브제는 주제와 관련된 구체적인 지표다. 따라서 작품의 맥락과 관련 없는 외적 오브제의 배치(본 그림에서는 자동차)는 그림 속 독서의 연속성을 점차적으로 끊는 방향으로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을 감상하면 난해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는 그가 사용하는 비틀어진 관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괘종 시계, 바나나, 기차 등과 같이 화폭의 맥락과 동떨어진 채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의 간극을 허무는 오브제의 사용 때문이기도 하다.

닫힌 공간적 연출: 여기서 나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사용했던 기법인 격리 기법을 사용한다. 격리는 회화적 서사를 끊는 가장 효과적 방법이다. 질 들뢰즈는 이에 대해 “서사는 그림의 상관물이다. 두 이미지 사이에는 언제나 하나의 이야기가 틈을 비집고 자리를 잡아 그림에 생기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이미지의 격리는 관계를 제거하고, 이야기를 멈추며, 묘사에 대항하고 형상을 해방할 수 있는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나의 그림에서, 두 인물은 평면적 사각형 속에 속박되어 상호 격리되어 있다. 베이컨이 형상을 정육면체, 구, 평행육면체 등에 고립시킨다면(베이컨은 면의 깊이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사각형의 평면화된 공간 내에 고립시키기를 선택했다. 나의 작업은 사실주의적 깊이감, 즉 입체감을 멀리한다. 오히려 주어진 면 안에서 사실주의적 공간의 사슬들을 끊으며 새로운 평면의 창조를 추구한다.

위와 같이, 우발성의 주입, 묘사적 절차의 역행, 디테일의 제거 등을 통해 서사적 성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더불어 내가 작업에 도입하는 기법인 표정의 제거, 임의적 문자의 추가와 같은 방식들은 그림을 서사적 논리성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적 평면에서 모든 수사학적 요소를 제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형상은 본래 언어와 관계를 맺는다. 내가 특정한 형상의 이미지를 그리거나 색칠한다면 내가 형상으로부터 감정의 동요를 느꼈기 때문이고, 이러한 감정에 특정한 방식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형상과 작가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는 장차 작품과 관객 사이의 교감으로 이어진다. 마치 상호적 및 비독점적인 소통과 같다. 작품은 더 이상 서사적 회화 작품처럼 읽혀지기를 소망하지 않으며 관객과의 소통과 놀이를 유발한다.

대표작 2 이미지

02 / REPRESENTATIVE WORK

대표작 2

가장자리는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속하는 화면의 경계선을 이용해 내부와 외부, 드러내기와 숨기기 간의 긴장감이 나타나는 공간이다. Ill. 13은 제목을 통해 가장자리를 강조하여 표현한 예다. 본 작품의 화면의 중앙을 모두 차지하는 인물은 아마도 한 식당의 서버(serveur, 종업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 작품에 고양이와 새(Le chat et l’oiseau)라는 제목을 붙여 탈중심화를, 단번에 보여지는 이미지와 제목 사이의 부조화에 의한 전복(renversement)을 시도했다. 이어, 틀이 발생시키는 문제에 대한 예술가들의 대응 방식을 살펴보는 것 역시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틀은 예술 작품을 존재하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으로, 20세기 회화의 역사를 살펴 보면 틀에 관한 해석과 시도(question du cadre)는 당대의 핵심적 문제제기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새(Le Chat et l’oiseau) (ill. 13)는 직사각형의 화면과 대비된 등장 인물의 형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바탕을 그릴 때는 붓을 사용했으나 인물의 내부를 그릴 때는 나이프를 사용했다. 형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인물의 구성을 강조할 수 있도록 균질한 방식으로 바탕을 다루었다(담배 피는 남자1과 2, 요리사 혹은 종업원(??) 참조). 나아가 형태는 도구에 의해 강조되기도 하는데, 형상(인물)에는 나이프(남성성)를, 바탕에는 붓(여성성)을 사용했다. 바탕에는 하나의 붓을 사용해 비교적 규칙적인 터치를 사용했다. 붓의 선택은 캔버스의 포맷에 따라 꽤나 중요한 선택이다. 고양이와 새(??)에서는 큰 면적의 바탕을 칠하는데 작은 호수의 붓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선택에 의해, 나는 미세한 파란 바탕의 색에 미세한 변화만을 가져가며 거의 동일한 두께와 길이를 갖는 터치를 반복해야 했다. 바탕에 두꺼운 붓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손의 반복적 제스처에 동반된 터치의 질감적 효과들을 즐기기 위해서다. 허나 이 인물 시리즈와 달리, 꽃과 새 시리즈에서 사용된 터치는 훨씬 충동적이고 생동감 있다. 형태를 강조하고 싶지 않았다. 자유로운 선의 그래피티와 구체적 형태를 희생하는 가벼운 터치로 놀고자 했다. 이 경우 터치는 화가의 자율성과 표현력을 뒷받침한다.

나는 긁어내기를 통해 얻어진 선이 자아내는 효과를 자주 활용한다. 고양이와 새 (ill. 13)를 재차 살펴보자. 긁어내기를 통해 옷 위에 입혀진 선들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본 작품은 형상 내부에 새겨진 강렬하고 단순한 선들로 특징 지어진다. 나는 깊이와 부피를 추구하지 않는 관계로, 선은 형상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필수적 요소이자 내가 접힌 자국(??ligne de pli)과 윤곽선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나의 인물 시리즈를 보자. 윤곽선의 경우 별 것 아닌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을 선호한다). 다시 말해, 깊이의 부재를 보충하기 위해 회화적 효과를 증대하는 다른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내가 찾은 방안은 선고 색이었다. 관습적(academique)이라 불리는 회화들을 들여다 보면 그 이유는 명확해진다. 시선이 부피이 집중되도록 선이 은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색의 순수함은 깊이를 찬미하기 위해 약화된다. 해당 분석을 통해, 우리는 부피-선, 깊이-색이라는 반(反)-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선과 색 효과의 증가는 부피와 깊이 효과의 감소로 이어진다. 나아가, 다소 인위적인 도식의 위험을 안고 간다면 부피와 깊이의 고전 예술의 속성으로, 선과 색을 현대 예술의 속성으로 특징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는 깊이감과 부피감을 희생양으로 삼아 선과 색의 가치를 드높여 이들이 갖는 고유한 힘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조형적 요소들을 다룰 수 있다. 다시 말해 깊이와 부피를 담보로 선과 색의 자율성에 가치를 부여해 평면을 찬양하는 작업이다.

대표작 3 이미지

03 / REPRESENTATIVE WORK

대표작 3

(논문)내가 즐겨 그리는 소재들 가운데 풍경은 매혹적인 주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풍속 속에 있으며, 이 풍경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양식이 된다. 문화는 자주 주변 환경의 유산이다. 주변 풍경은 예술 작품에 자연스럽게 투영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새로운 풍경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914년 클레의 튀니스(Tunis, 튀니지 수도; 역주) 여행은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클레는 해당 여행을 계기로 카페트의 기하학적 모티프와 색에서 영감을 받아 색채와의 유대를 발전시키고 추상화에 매료되었다. 뿐만 아니라 들라크루아, 반 고흐, 고갱, 마티스 등과 같은 화가들 여기 강렬한 색채와 특이한 모양으로 영감을 자극하는 남쪽의 깨달음을 쫓아 나선다.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풍경을 찾는 여행은 일상적 삶(일상적 작업)에의 자극, 시원한 공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게 풍경은 매우 흥미로운 분야로, 인물화와 대치하며 주기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인물화는 직사각형 화면의 공간에서 인물의 형상이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장르로, 여기서 형상의 힘은 필연적으로 강조된다. 한 순간, 한 장소에서 포착되어 고정된 형상인 인물화는 하나의 측면만을 드러낼 수 있는 특정한 상황의 묘사에 갇혀 있는 듯 하다. 반면 풍경화는 내게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다. 풍경화는 거대한 형상의 부재와 화면상 위계 질서를 파괴하는 상이한 오브제들의 중첩적, 동시적 배치로 특징 지어질 수 있다. 나의 풍경화에서 화면은 균질하다. 바탕과 형상은 서로에게 녹아 들어간다. 인물화가 형태, 안정성, 공간 속 배치를 추구한다면 풍경화는 삶, 움직임, 시간 속 제스처를 추구한다.

지금까지의 작업을 고려해볼 때, 나의 작품들은 인물화와 풍경화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초반 작업들에는 아이들이 있는 풍경화(풍경과 인물의 조합)가 많았다. 이후 인물과 풍경을 교차적으로, 혹은 동시에(다른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다. 연대순으로 정리된 나의 시리즈 제목들을 살펴보자: “뚱뚱한 남자(Gros homme)”, “작은 마을(Petit village)”, “작은 가족(Petite famille)”, “인물(Personnage)”, “그래피티 풍경(Paysage graffité)”, 등. 해당 시리즈들 중 ‘작은 마을’과 ‘그래피티 풍경’은 풍경화로 분류되고, 나머지는 인물화로 분류될 수 있다. 말하자면, 나의 관심은 우선 인물화에 집중되었다. 두 유형이 교차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인물 작업에서 무언가의 부족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의 결핍이 내게 인물과 풍경의 교차적 작업을 부추겼을까? 나의 내면을 살펴보면, 두 개의 관심사가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 형태의 구상과 형태의 파괴가 그것인데, 인물화가 전자의 힘의 지배를 받는다면 풍경화는 후자의 지배를 받는다. 한편, 여행은 나의 풍경화 작업에도 동기를 부여했는데, 나는 타지의 형상적 요소들의 이질성에 영향을 받았다. ‘작은 마을’ 시리즈는 아프리카 여행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남부(지중해 연안의 마을들)와 이탈리아 여행은 색채에 의해 내게 매우 강한 인상을 새겨 넣었다. 나의 머릿속과 크로키북에 새겨진 경험들은 언젠가 새로운 작업의 원천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허나 ‘그래피티 풍경’에 대한 영감은 타지가 아닌 내 개인의 회화적 경험으로의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 그래피티 풍경을 통해 두 부류의 대조적 특성들(공간-시간, 형태-제스처, 부동성-역동성)을 조화시키고 양립시키고자 했다. 해당 작업이 나의 문제의식에 대한 충분한 해결책이 되지 못 하며 하나의 접근법이자 방향성에 불과한 시도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래피티 풍경의 첫 번째 시리즈인 ‘꽃과 새(fleurs et oiseaux)’는 조화로운 양립에 도달하기보다는 시간 경험, 제스처, 역동성에 대한 만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원인은 단순하다. 내가 해당 주제를 통해 회화적 그래피티(낙서)의 기법과 효과를 작업에 도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피티는 문자뿐만 아니라 형상을 휘갈겨 쓰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문자적 특징과 구상적 특징의 융합이다. 나의 작업에서 그래피티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제스처에 의한 의미의 증폭. 둘째, 형식적 의미의 감축. (추가) 논문 속 작가는 “이탈리아 여행은 색채에 의해 내게 매우 강한 인상을 새겨 넣었다. 나의 머릿속과 크로키북에 새겨진 경험들은 언젠가 새로운 작업의 원천으로 되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 그러한 경험들이 강력한 인상과 영감으로 자리잡았지만 당시 김부연 작가는 이를 회화적으로 풀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김부연 작가는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네치아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게 된다. 프랑스에 거주하던 시절 미처 화폭에 담아낼 자신이 없던 베네치아를, 이제는 그릴 수 있겠다며 자신감에 찬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돌아와 그린 것이 “베네치아 풍경”이다. 베네치아 풍경을 시작으로 암스테르담 풍경, 센느강변 풍경, 남불의 풍경, 인도 풍경 등 풍경 시리즈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풍경 시리즈는 건물과 주변 풍경의 평면성, 인물과 사물의 정면성이 돋보이고, 색체의 사용에서는 작가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BIOGRAPHY / CHRO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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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약력] 1969 경남 진주 출생 ~2013 1995 홍익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학사 1998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 학사 2000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석사 졸업 논문 〈La peinture en tant que jeu〉(놀이로서의 회화) 2007 프랑스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박사과정 졸업 논문 〈L'espace pictural, l'espace ludique〉(회화의 공간, 유희의 공간) [주요 개인전] 2018 김부연 그가 바라본 아이 (유작전),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2015 갤러리 팔레 드 서울 (유작전), 서울 2009 아트 갤러리 유, 부산 2008 아트센터-노원문화예술회관, 서울 2007 SALLE D’EXPOSITION DE LA MAISON DE LA TUNISIE, 파리, 프랑스 2006 ARTSTUDIO PARIS MONTMARTRE, 파리, 프랑스 2003 문화공간 ‘BAGNEUX’ 바뇨, 프랑스 2001 갤러리 ‘BERNANOS’ 파리, 프랑스 [단체전 20회] 2007 파리-뉴욕전, 뉴욕 space worl 캘러리, 미국 2005 세계의 어린이들, 벵센느, 프랑스 2004 제2회 씨제 비엔날레, 씨제(Chize), 프랑스 2003 친구집에서의 만남(4인), 크레테이, 프랑스 2002 제47회 몽후즈 살롱전, 몽후즈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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