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조형 언어
이 용어들-즐기기(jouir), 행위하기(agir), 구축하기(construire), 파괴하기(détruire), 활기를 부여하기(animer), 조작하기(manipuler), 집중하기(concentrer), 조화하기(harmoniser)…-는 모든 회화적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용어들입니다.
우리 동의할 수 있을까요?
왜일까요?
그의 회화는 어떤 의미에서 특별히 '놀이(jeu)'이며, 그것이 '어린이적(childin)'이라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용어들…은 거의 모든 형태의 회화적 실천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용어들 혹은 이러한 성격들은 창조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제 회화에서는 회화적 놀이(jeu pictural)를 가장 자주 '어린이적 차원'과 연결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 말하자면, 회화적 놀이의 정점(sommet)은 아동화(peinture enfantine)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 경우, 제 회화는 이러한 성격들이 전적으로 어린이적 차원과 결합된다는 점에서 놀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이적 놀이를 하나의 진정한 놀이로 간주하며 이를 찾습니다.)
왜일까요?
1. 저에게 회화는 이성의 작업이 아니라 감각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의 회화적 활동은 자발성(spontanéité), 제스처성(gestualité), 상상된 형상화(figuration imaginée), 외관의 명랑함(gaieté de l'apparence), 자유 등과 같은 측면에서 회화적 놀이의 정점에 위치합니다.
2. 아동의 시각적 특성 또한 매우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아동적 시각이 진정한 회화적 놀이로 이끕니다.
저는 특히 아이가 추구하는 *'신호적 형식(forme signalétique)'*과 동시에 *'일반적 형식(forme générale)'*에 주목합니다.
신호적 형식은 호기심, 정서성(affectivité), 인상(impression) 등과 연결되며,
일반적 형식은 아이의 비구분적이며 무차별적인 정신 상태, 즉 개인적 성격에서 자유로운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개별성의 재현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호기심ᄋ인상ᄋ열의를 가지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흥미로운 시각이 현실주의와 환상 사이의 그 간극에서 매우 큰 에너지를 가지고 '놀이'할 수 있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회화 작업을 위해 이 아동적 시각을 회복하고자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신호적 형식(forme signalétique)으로 그리면서도 동시에 일종의 전체적 시각(globalité de la vision)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는 신호적이고 또 전체적인 시각의 미묘함을 통해, 아이는 개별적 특징에서 출발하여 일정한 형식의 보편성(généralité de la forme)을 확보해냅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시각 덕분에 아이가 사실주의와 환상, 그리기와 놀이 사이의 그 간극(intervalle)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일정한 사실성(réalisme)을 지닐 때 더 잘 놉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성이 회화적 놀이의 고갈되지 않는 대상들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종합적(synthétique)이고 전체적이며, 비구분적(indifférencié)이면서도 신호적인 아동의 시각, 다시 말해 덜 합리적이기에 오히려 더 예민한(sensible) 이러한 시각이 회화적 놀이의 본질적 동력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어린이적 차원을 계속 추구하고자 합니다.)
어느 정도 나이에 이른 아이를 상상해 봅시다.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이성이며 과학적 시각(vision scientifique)입니다.
반면 그가 잃게 되는 것은 바로 그의 혼돈(chaos)입니다.동양적 사유(pensée orientale)?
어쩌면… 저는 종종 은유적이며 때로는 시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거나 논평하곤 했습니다.
또 어떤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자(漢字)의 분석에서 출발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자가 사유의 궤적, 즉 인간 사유의 일종의 역사 자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원하는 놀이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연(cerf-volant) 놀이' 분석, 회화에 대한 설명 등…)
(이 방식을 '동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이러한 은유적 방식을 자주 사용한 이유는, 어떤 사물을 직접적으로 분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받으면, 저는 거의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자 '회화(繪畵)'의 분석과 같은 간접적 설명 방식-어떤 유도적(inductif) 접근-혹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놀이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실제의 '연놀이'를 분석하는 방식 등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노자(Lao-tzeu)는 도(道)를 드러내기 위해 물, 골짜기, 풀무( soufflet ) 등의 은유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는 인간의 언어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은유는 상상하게 하고, 드러내고, 환기시키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지(image)'의 역할입니다.)
즉, 어떤 핵심(noyau)을 건드리고자 할 때, 그 핵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그 핵을 둘러싼 주변(periphery)을 더듬거나 되돌아가 그 주변을 통해 핵심을 암시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대중(공중)과의 관계 속에서 본 나의 회화의 위치
…저에게 회화란 사회(공중)를 향한 절규도 아니고, 사회 앞에서의 맹세도 아니며, 어떤 증언도, 약속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면을 향한 지속적인 대화에 가깝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의 내적 여행, 사유와 제스처의 여정이며, 따라서 개인적 놀이(jeu personnel)입니다.
그러나 제 회화에 대해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제 작업이 어느 삶에든 긍정적 성장을 돕는 빗물 한 모금 정도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어린이적 차원(L'enfantin)
…저는 종종 어린이의 정신을 혼돈(Chaos), 공허(Vide), 원초적(Originel) 상태와 결부시켜 왔습니다.
따라서 회화의 세계 안에서 이러한 성격들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저는 어린이-어른, 혼돈-질서라는 이 대립 앞에서 약간 마음이 뒤흔들리곤 합니다.
회화는 결국 이 원초적 혼돈 속에 어떤 질서를 구성해 나가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제가 Tchjuantch와 함께 제 논문에서 이미 설명했듯, 혼돈은 존재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혼돈을 죽이지 않으면서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시타오(Shitao)가 자신의 '일획(Unique Trait de Pinceau)'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처럼, 저는 어린이의 제스처, 즉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지닌 어린이의 획(trait d'enfant)을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다른 회화적 놀이(jeu pictural)?
놀이는 여러 층위가 존재합니다. 사유의 놀이, 말놀이, 신체적 놀이 등등.
이와 마찬가지로 회화적 놀이에도 여러 양식이 존재할 것입니다. 차가운 놀이, 뜨거운 놀이, 자발적 놀이, 규칙화된 놀이 등.
따라서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액션 페인팅 등도 일정한 놀이적 측면을 포함하지만, 그것들이 전적으로 회화적 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 저는 회화만 하는가?
-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여러 조형 활동 중에서도 저는 회화를 좋아합니다.
- 제가 주로 이 회화라는 영역에서만 작업해 온 이유는, 이 회화의 영역이 매우 광대하고 깊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방대한 회화의 장 속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영역에는 여전히 탐구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놀이적 패러다임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폄하할 위험은 없는가? 그리고 당신의 기준이 미술사 중 특정 측면만을 참조하는 것은 아닌가?
사유의 놀이, 신체적 놀이, 말놀이 등 여러 종류의 놀이가 존재하듯, 회화 안에서도 회화적 놀이에는 여러 층위가 존재합니다.
제가 제 회화 작업과 제가 감응해 온 일부 작가들을 바탕으로 회화적 놀이의 어떤 분류를 시도했다고 해서, 그러한 놀이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작품들, 그 질적 깊이, 열정, 그리고 과학적 관찰을 존중하고 감탄합니다. 또한 그들이 원근의 놀이, 깊이의 놀이를 재현하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제가 클레(Klee), 뒤뷔페(Dubuffet), 아펠(Appel), 트웜블리(Twombly) 등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화가들의 회화를 자주 선호한다고 말해 온 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그 시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기를 색채적ᄋ선적ᄋ제스처적 활용 측면에서 회화적 개화기, 또는 회화적 비약의 시기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회화적 공간의 개념에 있어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회화의 표면(surface)은 재현의 장소, 현실 공간을 전사ᄋ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 표현의 장소, 즉 예술가의 내밀하고 주관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전환 속에서 저는 평면으로 간주된 표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과학적ᄋ분석적 시각에서 정서적ᄋ어린이적 시각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하나의 동력입니다.
나의 '어린이적' 회화는 원초적 놀이로의 귀환인가?
현재로서는, 나의 어린이적 회화가 회화적이며 원초적인 놀이(jeu pictural et originaire)를 탐구하려는 진지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나의 회화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어린이적이지 않습니다.
내가 제거해야 할 수많은 '성인의 층(layers d'adulte)'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내가 행복한 이유는, 앞으로의 작업을 내다보며, 나의 장차 회화가 이 진정한 어린이적 길 위에 놓이게 될 하나의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20세기 초, 특히 파울 클레(P. Klee)가 어린이적 차원에 관한 탐구를 시도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넓은 장(場)에는 아직 탐색되지 않은 공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저는 나의 어린이적 회화와 함께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 하나의 확신과 긍정적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0세기 초부터 어린이적 차원에 대한 연구가 있어 왔다 하더라도, 아직도 많은 공간ᄋ영역이 탐구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회화는 아직 진정으로 어린이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오늘 제가 기쁘게 느끼는 것은, 앞으로 나아갈 나의 회화가 이 어린이적 길 위에서 가능성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는 이 어린이적 길이 회화적이면서 원초적인 놀이로 이어진다고 기대하고 그렇게 판단합니다.
분명 저는 아동화에서 여러 문제들을 봅니다.
아동의 그림은 종종 도식화되고(schématisé), 서로 비슷비슷해집니다.
장 뒤뷔페(J. Dubuffet) 역시 아동화의 한계-어떤 폐쇄된 정신 상태-를 지적한 바 있으며, 그는 자신이 가진 '더 긴 다리(longue jambe)'로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습니다.
저 역시 아동화에서 이러한 문제를 느끼고 있으며, 오히려 제 삶의 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직사각형의 서브스트레이트(subjectile rectangulaire):
저는 직사각형 서브스트레이트에 대해 일정한 규범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떤 규범을 세웠다고 해서, 그 규범 안에 자신을 가두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일단 규범이 설정되고 나면, 그 규범은 제가 겨냥하는 목표이자 동시에 깨뜨리는 대상이 됩니다.
혹은, 보다 긍정적으로 말해, 그 규범은 제가 가지고 노는 하나의 놀이 대상(objet de jeu)이 됩니다.
저는 그것을 수정할 수도 있고, 배반(trahir)할 수도 있습니다.
'놀이(jouer)'라는 성격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놀이가 규칙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놀이는 또한 규칙을 새로 만든다(créer la règle)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이는 창조적 정신과 함께 움직입니다.
그리고 창조는 파괴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직사각형은 파괴되어야 할 어떤 것입니다.
그것(나의 회화)은 근대성의 계승자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클레(Klee), 뒤뷔페(Dubuffet), 트웜블리(Twombly) 같은, 제가 논문에서 자주 언급한 화가들을 좋아합니다.
이는 곧 제 회화의 동력이 그들이며, 20세기 전반이라는 시기가 제게 훨씬 매혹적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저는 조금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가들이 제 회화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제가 언젠가 넘어서야 하는 일종의 장벽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가 이 시기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 시기를 색채적ᄋ선적ᄋ제스처적 활용과 관련하여 회화의 개화기(épanouissement) 혹은 비약의 시기(élan)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회화적 공간에 대한 사유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회화의 표면은 더 이상 재현의 장소, 현실 공간을 필사하거나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 표현의 장소, 즉 예술가의 내밀하고 주관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저는 평면으로 간주된 표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과학적ᄋ분석적 시각에서 정서적ᄋ어린이적 시각으로 이동시키는 하나의 동력(moteur)이기 때문입니다.
회화성(picturalité)·조형성(plasticité)과 놀이적 차원
회화성(그리고 조형성)의 개념이 놀이적 차원과 결부될 때, 그 사용은 신중하고 엄밀해야 합니다. 즉, 주의 깊게 정의되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는 제 논문의 핵심 쟁점이기도 합니다.
회화적 차원과 놀이적 차원의 조율은 여러 질문을 제기합니다. (저의 회화가 다른 다수의 '놀이적 실천'들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문제 등…)
처음부터 제 의도는 회화성을 통해 공간성과 시간성의 일종의 통합을 탐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공간성과 시간성, 조형성과 제스처성, 형식의 성질과 시간의 성질을 회화성의 도움으로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회화성은 형식과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회화가 놀이와 결합될 때 시간의 흔적은 훨씬 중요해집니다. 왜냐하면 놀이란 그 결과보다 진행 과정 속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회화적 과정이 공간성과 시간성, 조형성과 제스처성-달리 말해 공간의 성질과 시간의 성질-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자주 강조해 왔습니다. (제가 말하는 '그라피티풍 풍경' 설명)
'회화적(pictural)', '회화성(picturalité)', 그리고 '조형성(plasticité)'의 개념은 제 논문의 주요한 쟁점입니다.
제가 회화적 영역을 놀이적 차원과 조율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둘을 어린이적 성격을 통해 매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회화성과 놀이성은 매우 다른 두 영역으로, 동일한 축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회화성은 주로 물질성(materialité)을 지시하는 반면, 놀이성은 주로 정신의 상태(état d'esprit)를 향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둘을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이적 성격이 두 영역을 이어주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예술을 숨기는 예술이다.
열정과 생명력으로 의식을 넘어서는 것.
서사성(Narration)에 대하여 :
회화는 우선 '언어'이지만, 특수한 언어이다.
내 회화에서 내가 서사적 차원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려 하는 것은 바로 회화적 차원, 형상적 차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서사의 개입은 형상 혹은 이미지가 지닌 힘을 약화시킨다.
이미지가 일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지와 언어가 서사적 동맹을 맺는 순간, 이미지는 곧바로 그 고유한 힘을 잃어버린다.
이미지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어버리고, 더 이상 자율적 존재가 아니다.
내게 있어 이미지는
'드러냄(révélation)'의 의미,
'자기-현존(auto-présence)'의 의미를 유지해야 한다.
'서술(raconter)'하거나, '지시(désigner)'하거나, '설명(expliquer)'하는 기능을 맡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한 그림 안에 뚜렷한 일화적 내용이나 서사가 없다면, 그 그림은 자신이 말을 건네야 할 상대를 찾아 나선다.
즉, 그림은 관람자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그림(이미지)과 관람자 사이에 생겨나는 중간적 공간,
그 이미지와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그 공간이다.
이 효과는 그림이 수동적으로 '읽히는 것'을 멈추고,
그림이 자기 고유의 언어, 즉 회화적 언어(langage pictural)로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나타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나에게 회화는 이미지의 예술이지, 언어의 예술이 아니다.
그럼에도 회화 속에서 서사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서사는 언제나 돌아온다.
그리고 어떤 것이 반복적으로 돌아올 때-이를테면 새(bird)가 자주 등장할 때-그것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사는 모호한 서사이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위한(raconter)' 서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위한(parler à)' 서사이다.
필연-우연 혹은 필연-자유의 관계 :
놀이 속에서는 필연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던 대립이 서로를 소멸시킨다.